예뻐지는 여자들의 공간 - 여자이야기
당신의 패션철학은 무엇입니까? 본문
여자이야기에 많이 들어와서 꼼꼼하게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 저는 패션 에디터가 되고 싶어요! " 라고 소리쳐 외치는
이스터의 끝없는 절규를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_-;;
패션 에디터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이에 대한 욕망의 분출구이자
수련의 장이 된 블로그가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패션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들이 얼마 없다는 이유로
생각지 않게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 말하기에 너무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잠시 도취되었었던 것 같다.
패션 블로거로서 인정받고 어느정도 얻게 되는 일종의 특권에 대해.
아무리 '이건 내 개인적인 공간이고, 난 내 길을 꿋꿋이 갈꺼야.
다른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겠어.'
라고 수십번 다짐해도
화려하게 포장되어 날아오는 인비테이션을 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패션업계의 동향을 일하는 사람도 아닌 학생의 신분으로
비교적 남들보다 빨리 접할 수 있다는 특권(?!)의 맛은 달콤했다.
그러나, 결국 긴 빛의 시간이 가면 결국 어둠이 스멀스멀 다가오듯
'패션'이라는 단어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 않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들어 있는 일부의 진실처럼
'패션계'
그것도 '럭셔리' 라는 비싼 단어를 앞에 단 하이패션의 세상은
보시다시피 화려했고
들으셨다시피 황홀했지만
예상하시다시피 내것이 아닌 하룻밤의 이벤트로 끝나는 일장춘몽 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름 학생의 신분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건방지게도 매너리즘에 빠지기라도 한건지 무료해져가고 조금 지쳐가기도 했다.
게다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패션에 대한 관심과 에디터라는 직업군에 대한 열병이
여대생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전염되기 시작하면서
패션에 대한 한가닥의 생각들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형태로 퍼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이스터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누군가의 업적을 바라보며 달래야 하는 쓰라림이 아니라
패션에 대한 글을 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식상한 내 자신의 글 때문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매거진을 한두권만 뒤져봐도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는 트렌드 정보들.
인터넷을 뒤지다보면 이스터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부지런하게 소식을 전하는 블로거들.
자신이 무엇보다 잘 해내고 싶은 분야에서
스스로가 대체 가능한 존재로 느껴질때의 낙담은......
마치 신나게 놀다가 어딘가에 부딪힌 후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뼈 속까지 스며드는
피멍의 고통과도 비슷했다.
어느 순간 상처가 났음을 인식하게 되고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점점 밀려드는 고통으로
신체의 한 부분이 잠시 마비가 되듯...
나 역시도 그렇게 무력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자신이 작성한 모든 글이 진부해지고 그래서 싫어지고...
패션을 너무 사랑하지만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이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치부하고 굳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어를 두세개쯤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으로 하는
국제적 감각을 지닌 활기찬 여대생들.
가슴을 쓸어 내리게하는 놀라운 편집력과 글 솜씨의 경쟁자들
색다른 기획력으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질투감을 유발하는 블로거등......
이스터의 주변에 나타나는 새로운 얼굴의 잠재적 라이벌들은
늘 자신이 모자라다고 일 깨워주는
일종의 건전한 약과 같은 역할을 했음에도
찾아드는 무력감을 막아낼 방파제가 마음속에 없었나 보다.
사실 '열심히 해야지' 혹은 '나아질거야'
라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수십번도 넘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심지어 주말에 일찍 일어난 아침은......
해야할 일과 공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어도
왜 일찍 일어났는지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공허하기까지 했다.
이스터의 사고는 점점
" 난 패션 에디터가 되고 싶어. 하지만 들어가는 문이 너무 좁아. 어쩌지?
난 취업해야 하는데! "
라는 조바심난 그냥 대학교 4학년의 위태로운 모습으로 굳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터의 소중한 사람이 말해 주었다.
" 에디터가 되고 싶은게 니 목표야?
단지 그것 뿐이야?
그럼, 넌 못견딜꺼야.
설령 거기 한발 다가가게 된다해도 곧 물러서게 될 거라고."
처음엔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싶었는데......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에디터가 되는게 단지 목표여서는 안되는 거 아니야?
니가 에디터가 되고 싶다면 에디터로서 무엇이 하고 싶은지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한 철학이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구.
에디터는 직함일 뿐 이잖아.
패션을 쓰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이루고 싶거나 표현하고 싶은 철학이
니 속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순간 뭔가 충격이 밀려드는 것 이었다.
패션에 철학?
무슨 철학?
매 시즌 디자이너 컬렉션을 분석하고 트렌드를 짚어내고,
브랜드의 소식을 정리해서 전달하고
영향력 있거나 잠재력 있는 인물을 섭외하고 인터뷰해서
사회 현상과 문화 흐름을 잘 읽어서 기사를 작성하면 되는거 아니야?
아직 에디터가 된 것도 아니고 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판에 왠 김칫국이야?
패션에 무슨 철학이 있어?
이스터의 머리를 스친 생각들은 아마 이런것들 이었을 것이다.
멋지게 그의 입을 막아버릴 그럴듯한 이스터만의 철학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패션을 사랑한다.
패션 저널리스트가 되어 이 한 몸 불사를 각오가 되어있다.
라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외치며
어줍잖은 허영심과 행사에 눈먼 이들을 속으로 업신여겨 왔지만
실은 이스터 역시도 패션에 대한,
패션 에디터로서 가져야 할 철학에 대한 고민을 한번도 깊이.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더욱 창피했던 것은 이스터 스스로가
'이번 시즌 꼼 데 가르송의 의상은 레이 가와쿠보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따위의 말들을 남발할 정도로
디자이너들의 패션 철학에 대한 리서치를 수 없이 해 보면서도
자신의 철학에 대한 고민에 끝 없이 게을렀다는 사실이다.
그저 그것이 되기에 급급했을 뿐
그 목적에는 이유없는 열망만 가득했었나 보다.
모든 일에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는 반발심이 떠올랐지만,
일생을 바쳐 계속 이루어가고자 하는 일 이라면 누군가의 눈에는 시시껄렁하거나
추상적이기 짝이 없을 정도로 공중에 뜬 철학일지라도
하나 쯤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결론에 이르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스터가 머리 속으로 막연하게나마 그려온 패션 에디터의 모습에.
그러나 그 형태가 잡히지 않았고 자꾸만 멀어져 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나보다.
디자이너에게 색깔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늘 강조했던 것 같다.
게다가 개성이 뚜렷한 디자이너 마저도 그 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며 전달이 잘 되어야만 한다.
모델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9등신 , 10등신 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황금비율의 모델 중 선택받는 단 한 사람이 되려면
타인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이미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에디터에 이르면
결론은......
멀리 수지 멘키스나 로빈 기브한과 같은
유명 해외 에디터들에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스터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국내 패션 저널리스트들이 간혹 출간하는 책이나
그들의 심도있는 기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스터가 스스로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고 느꼈던 좌절감은
아마도 노력이 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 속에 많은 계획이 있었지만
시간이 없고 바쁘단 핑계로 실행에 옮기길 거부했고,
멋진 칼럼의 소재가 생각나도 '나중에......'로 미루며
편리하고 간단한 화보로 그 자리를 메웠다.
스스로 해 온것이 적었기 때문에
눈 앞에서 덜어냈다고 생각했던 짐들이
살금살금 뒤로 돌아와 등에 다시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분명 무언가가 있는 듯 하지만 '이겁니다!' 하고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스터만의 패션철학을 찾기 위해
이제 막 한 걸음 떼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을 뿐 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쉽게 얻는 것은 쉽게 빼앗기기 마련이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비슷하게 배껴 만들어가다보면
결국 남들만한 사람으로 밖에 성장하지 못할 것 이라는 점 이다.
패션은 단순히 옷이 아니다.
걸치지 않고 옷장에 걸려 있는 것은 조금 복잡하게 구성된 천 쪼가리 일 뿐.
사람이 입기 시작해야 비로소 '옷'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이와의 '세번째 데이트' 혹은 '일주년 기념 드레스' 처럼
옷에는 각각의 스토리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이스터는 Look 혹은 Styling 이전에
'사람'을 바라보는 작업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은 사람이 시작이었으며
패션은 더욱 그러하다.
이 곳에서 찾게 되는 것이
과거의 아련한 추억에 묻힌 포근한 할머니의 옷자락일지
현란한 프린트와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예술로서의 의상이 될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미래의 새로운 첨단웨어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아직 이스터는 자신의 패션철학을 찾는 그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리고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이제 막 가방을 꺼내들고 짐을 싸기 시작했을 뿐 이니까.
컨텐츠제공: 이스트앤
컨텐츠위치: http://www.w-story.co.kr/magazine/magazine.php?tfp=5.2&board_class=52e6cb933ba5f0ce525f&post_no=7&idx=427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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